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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설국』은 눈 덮인 온천 마을을 배경으로, 도쿄에서 온 무위도식하는 유부남 시마무라와 순수한 게이샤 고마코, 그리고 신비로운 소녀 요코의 덧없는 사랑과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그린 소설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서정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설국의 풍경 속에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변화와 덧없는 관계를 탐미적인 문체로 담아냅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에 끌리면서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요코의 투명한 아름다움에서는 비현실적인 매혹을 느낍니다.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게이샤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녀의 열정은 설국의 차가운 눈처럼 덧없이 스러져 갑니다. 이 소설은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그들의 행동과 대화, 그리고 설국의 아름답고도 허무한 풍경 묘사를 통해 독자 스스로 감정의 여백을 채우도록 유도합니다.
허무주의와 탐미주의가 깃든 가와바타 특유의 문체는 일본 전통의 미의식과 맞닿아 있으며,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설국』은 단순한 연애 소설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 그리고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눈 덮인 풍경 속에 녹여낸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잊을 수 없는 미적 체험을 선사합니다. 마지막 장면의 화재와 은하수는 삶의 허무함과 그 속에서 빛나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터널 저편의 눈, 그 순백의 허무 속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1968년)로, 섬세하고 탐미적인 문체, 일본 전통의 미의식과 현대적인 감수성의 결합,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를 그린 작품들로 세계 문학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설국』(雪国, 1935-1947)은 집필에만 10년 이상이 걸린 장편 소설로, 가와바타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들을 단숨에 설국이라는 비현실적이고도 매혹적인 공간으로 이끌며, 일본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도입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도쿄에서 서양 무용에 관한 평론을 쓰며 무위도식하는 유부남 시마무라입니다. 그는 현실의 번잡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삶의 어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눈 덮인 온천 마을, 즉 '설국'을 여러 차례 방문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두 명의 여인, 게이샤 고마코와 신비로운 소녀 요코를 만나게 됩니다. 고마코는 한때 도쿄에서 무용가의 제자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게이샤가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시마무라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칩니다. 그녀는 매일 밤 술 시중을 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고된 삶 속에서도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자신의 내면을 가꾸려 노력하는, 맑고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이러한 순수함과 헌신에 끌리면서도, 그녀와의 관계에 깊이 빠져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고마코의 사랑을 '헛수고'라고 느끼면서도,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열정과 순수함에 매혹됩니다.
또 다른 여인 요코는 시마무라가 처음 설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목격하는 인물로, 병든 약혼자 유키오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아름답고 투명한 소녀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슬픈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의 존재 자체는 마치 설국의 맑고 차가운 공기처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합니다. 시마무라는 요코에게서 고마코와는 다른 종류의 매혹, 즉 현실을 초월한 듯한 순수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요코는 고마코와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소설 전체에 걸쳐 신비롭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인물들 간의 관계에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이처럼 『설국』의 서론은 주인공 시마무라가 현실 세계를 벗어나 눈 덮인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들어서는 과정과,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두 여인과의 관계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설국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내면 풍경과 그들의 덧없는 관계가 투영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허무, 사랑의 덧없음,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미적 체험과 함께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의 관계가 설국의 풍경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를 함께 따라가 볼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여백과 함축 속에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순수의 열정, 허무의 그림자: 고마코와 시마무라의 엇갈림
『설국』에서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는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사랑의 본질과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탐구하는 중요한 매개가 됩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 앞에서 끊임없이 망설이고 방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고마코의 열정적인 애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녀에게 진정한 마음을 주거나 미래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마코를 '아름다운 허무'의 대상으로 관찰하며, 그녀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려 합니다.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동경하는 어떤 순수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한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고마코의 육체적인 매력과 그녀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끌리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랑이 결국에는 '헛수고'로 끝날 것이라는 냉정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도시의 지식인이자 유부남이라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삶과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허무주의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면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바칩니다. 그녀는 게이샤라는 직업 때문에 많은 남성들을 상대해야 하지만, 시마무라에게만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시마무라를 만나기 위해 눈길을 헤치고 달려오고, 그에게 자신의 일기와 독서 노트를 보여주며 내면을 공유하려 애씁니다. 그녀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헌신적이지만, 동시에 위태롭고 절망적입니다. 그녀는 시마무라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계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마음을 거두지 못합니다. 고마코의 방은 그녀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그녀가 읽은 책들과 악보, 그리고 그녀의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시마무라는 이 방에서 고마코의 순수함과 고독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고마코가 술에 취해 시마무라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절망감을 토로하는 장면들은 그녀의 내면에 쌓인 슬픔과 좌절감을 보여주며,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겨운 것인지를 암시합니다.
요코의 존재는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에 미묘한 긴장감을 더합니다. 시마무라는 요코의 투명하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그녀를 통해 어떤 이상적인 순수함을 발견하려 합니다. 요코는 고마코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유키오를 통해), 고마코에게는 일종의 경쟁자이자 동시에 애증의 대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기차 안에서 시마무라가 창문에 비친 요코의 눈동자와 고마코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장면은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현실과 비현실, 순수와 열정, 그리고 두 여인의 운명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요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며,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 그리고 설국의 허무한 아름다움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과 대화, 그리고 주변 풍경에 대한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그들의 내면세계를 암시합니다. 특히 설국의 차갑고 깨끗한 자연 풍경은 인물들의 감정과 운명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눈 덮인 산, 얼어붙은 강, 고요한 온천 마을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쓸쓸하고 허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등장인물들의 덧없는 사랑과 고독감을 심화시킵니다. 가와바타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시적이며, 여백의 미를 통해 독자 스스로 많은 것을 느끼고 상상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는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 순간적인 감각의 섬세함,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탐미적인 시선으로 포착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미적 감동과 함께 삶의 허무에 대한 성찰을 안겨줍니다.
은하수 아래 타오르는 불꽃, 아름다운 허무의 미학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고마코의 집 근처 누에고치 창고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과 그 속에서 빛나는 은하수의 이미지를 통해 강렬하고도 상징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불길 속에서 요코가 떨어지고, 고마코가 미친 듯이 그녀를 구하려 달려드는 장면은 삶의 비극성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연대의 절박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시마무라는 이 모든 광경을 마치 꿈결처럼, 현실과 분리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밤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됩니다. 이 순간, 그는 지상의 모든 혼란과 고통이 은하수의 영원한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강렬한 허무감을 경험합니다. 화재라는 격렬한 소멸의 이미지와 은하수라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의 대비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허무와 탐미주의의 정점을 이루며, 독자들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숭고한 미적 체험을 선사합니다.
시마무라는 결국 설국을 떠나 도쿄로 돌아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고마코의 순수한 사랑과 요코의 신비로운 이미지, 그리고 설국의 차갑고 아름다운 풍경이 깊은 잔상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설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삶의 어떤 진실이나 해답을 얻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 그리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방관자적인 태도와 냉정한 시선은 끝내 변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깊은 공허함과 세상에 대한 미묘한 슬픔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시마무라 자신이 바로 '설국'이라는 허무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갇힌 또 다른 고독한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설국』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과 일본 전통의 미의식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을 통해 삶의 덧없음과 그 속에서 순간적으로 빛나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본질적인 고독과 허무를 특유의 섬세하고 탐미적인 문체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여백과 암시, 그리고 자연 풍경과의 교감을 통해 독자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가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마치 한 편의 하이쿠나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한 독서 경험을 제공하며, 독자들에게 지적인 이해를 넘어선 감성적인 울림을 전달합니다.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아름다운 문학적 성취 때문일 것입니다. 『설국』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나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불확실성과 허무함 속에서 발견되는 순간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적인 순수함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일깨워줍니다. 눈 덮인 온천 마을의 고요함 속에서 펼쳐지는 시마무라와 고마코, 그리고 요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설국』은 차가운 눈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동백꽃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며 오랫동안 독자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