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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자 부커상 수상작인 『남아 있는 나날』은 20세기 중반 영국을 배경으로, 평생을 완벽한 집사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살아온 주인공 스티븐스가 자동차 여행을 떠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잃어버린 감정과 기회들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그린 섬세하고도 슬픈 소설입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셨던 달링턴 경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직업적인 사명감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 특히 동료 여집사였던 켄턴 양에 대한 애정을 억누르고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위대하고 의미 있었다고 믿으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끊임없이 후회와 자기기만,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것을 느끼게됩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영국의 집사라는 인물을 통해 맹목적인 충성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인간이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합리화하고 기억을 왜곡하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이시구로는 스티븐스의 절제되고 신뢰할 수 없는 목소리를 통해 독자들에게 행간의 의미를 추리하고 그의 진짜 감정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며, 잔잔한 문체 속에 깊은 슬픔과 아이러니를 담아냅니다. 『남아 있는 나날』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라져가는 가치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과 선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작품입니다.
과거를 향한 쓸쓸한 회고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는 일본계 영국 소설가이자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그의 작품들은 종종 기억, 정체성, 그리고 과거의 상처라는 주제를 절제되고 섬세한 문체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통해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과 함께 지적인 성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1989년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은 이러한 이시구로 문학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 영국인 집사의 시선을 통해 사라져가는 시대의 가치와 개인의 억압된 삶, 그리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감동적이면서도 쓸쓸하게 그려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과거 회고록을 넘어, 인간의 자기기만과 후회, 그리고 진정한 위엄과 행복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심오한 심리 드라마입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1956년 영국, 주인공이자 화자인 집사 스티븐스가 새로운 미국인 주인 패러데이 씨의 제안으로 며칠간의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스티븐스는 수십 년 동안 영국의 유서 깊은 저택 달링턴 홀에서 집사로 일하며, 완벽한 직업적 소명과 '위엄(dignity)'을 지키는 것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과거 달링턴 홀에서 함께 일했던 여집사 켄턴 양을 다시 만나 그녀를 복직시키려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점차 자신의 과거, 특히 자신이 평생을 바쳐 모셨던 달링턴 경과 함께했던 시절, 그리고 켄턴 양과의 미묘했던 관계를 되돌아보는 내면적인 여정으로 변해갑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엄 있는 집사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모셨던 달링턴 경이 얼마나 위대한 신사였는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는 달링턴 경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했으며, 달링턴 홀에서 열렸던 수많은 중요한 국제 회의들이 세계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러한 위대한 주인을 모시는 것이 자신의 삶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그는 집사로서의 '위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며, 주인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회상 속에는 미묘한 균열과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만, 종종 중요한 사건들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켄턴 양과의 관계를 회상할 때, 그는 그녀의 애정 표현이나 자신을 향한 실망감을 애써 외면하고 오직 직업적인 관계로만 규정하려 합니다. 이러한 스티븐스의 '신뢰할 수 없는'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행간의 의미를 추리하고 그의 진짜 감정과 과거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며, 이야기의 긴장감과 깊이를 더합니다.
억압된 감정과 놓쳐버린 사랑
스티븐스의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위엄'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적인 감정과 인간적인 관계를 철저히 희생시킨 삶의 기록입니다. 그는 집사로서의 완벽한 직무 수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연회 준비를 위해 자리를 지킬 만큼 직업적인 사명감에 투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진정한 '위엄'의 발현이라고 여기지만, 독자들은 그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슬픔을 억누르는 비정함과 자기기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위엄'은 사실상 그의 감정을 억압하고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단단한 갑옷과도 같았습니다.
스티븐스와 켄턴 양의 관계는 이러한 그의 억압된 삶의 비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켄턴 양은 지적이고 유능한 여집사로, 스티븐스와 함께 일하며 그에게 존경심과 함께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그녀는 스티븐스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와의 인간적인 교감을 시도하지만, 스티븐스는 그녀의 접근을 오직 직업적인 관계로만 해석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특히 켄턴 양이 책을 읽고 있는 스티븐스의 방에 찾아와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하며 다가서는 장면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스티븐스의 감정적 회피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켄턴 양에게 마음이 흔들리지만, 집사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결국 그녀를 밀어내고 맙니다.
또한, 스티븐스는 자신이 그토록 위대하다고 믿었던 달링턴 경이 실제로는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나치의 동조자로 이용당했으며, 그의 정치적 활동이 오히려 영국에 해를 끼쳤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달링턴 경이 유대인 하녀들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조차,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인의 명령에 묵묵히 복종했던 자신의 과거를 애써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의 맹목적인 충성은 결국 그를 도덕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모셨던 주인이 사실은 실패한 이상주의자였으며, 자신의 헌신 또한 헛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워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스티븐스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그의 내면 심리와 자기기만의 과정을 매우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독자들은 스티븐스의 절제되고 격식 있는 언어 이면에 숨겨진 그의 진짜 감정, 즉 후회, 슬픔, 그리고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서술은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논리적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모순과 생략, 그리고 무의식적인 자기 변명이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지적인 즐거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소설이 중심에서는 이처럼 『남아 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의 '위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그의 삶을 지배하고 억압했는지, 켄턴 양과의 놓쳐버린 사랑이 주는 비극성, 그리고 달링턴 경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가져온 결과를 구체적인 회상 장면과 함께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개인의 선택과 시대적 상황, 그리고 기억의 불확실성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초상화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들을 위하여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스티븐스가 마침내 여행의 목적지에서 켄턴 양(현재는 벤 부인)과 재회하지만, 그녀 역시 이미 결혼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으며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쓸쓸한 클라이맥스를 맞이합니다. 그는 켄턴 양에게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그녀와 헤어지고, 바닷가의 한 부둣가에서 자신의 지나온 삶 전체가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평생을 지키려 했던 '위엄'과 충성은 결국 그에게서 인간적인 행복과 사랑을 앗아갔으며, 그에게 남은 것은 깊은 후회와 상실감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스티븐스가 마침내 자신의 자기기만과 마주하고,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리는 감동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순간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아직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으며, 새로운 미국인 주인 패러데이 씨와의 관계 속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배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다짐합니다. 그는 저녁이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일 수 있듯이, 인생의 황혼기 역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이 결말은 독자에게 깊은 연민과 함께 잔잔한 위로를 선사하며,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이 작품이 부커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한 집사의 개인적인 회고록을 넘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라져가는 가치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티븐스의 이야기는 맹목적인 신념이나 직업적인 사명감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우화입니다. 또한, 기억의 불확실성과 자기기만이라는 주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특유의 절제되고 정제된 문체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정교한 서사 기법을 통해 이러한 심오한 주제들을 탁월하게 형상화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억압된 감정과 놓쳐버린 기회들에 대한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회고록이자, 인간의 자기기만과 후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삶을 긍정하려는 노력의 가치를 탐구한 심오한 작품입니다. 스티븐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허상이나 관습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독자들의 마음속에 남아, 스티븐스의 쓸쓸한 뒷모습과 함께 우리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과거의 후회보다는 현재의 작은 행복과 인간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