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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의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백색 실명' 전염병이 도시 전체로 확산되면서 벌어지는 극한 상황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그린 충격적이고도 문제적인 작품입니다. 갑작스럽게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버려진 정신 병원에 격리되고, 그곳에서 문명의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과 야만적인 폭력이 난무합니다. 이 끔찍한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한 의사의 아내는 눈먼 남편을 돌보며 이 모든 참상을 목격하고,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게됩니다.
사라마구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생략하고,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이어진 독특한 문장 스타일을 사용하여 독자들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로 이끌며, 시각의 상실이 가져오는 공포와 그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재난 소설을 넘어, 사회 시스템의 취약성과 인간 이성의 한계,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심오한 철학적 우화입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본다는 것'의 의미와 인간적인 연대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며,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과 무관심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던지는, 잊을 수 없는 문학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백색 실명, 문명의 종말과 야만의 시작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인으로, 그의 작품들은 종종 역사적 사건이나 일상적인 현실을 비틀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문체, 즉 등장인물의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독자에게 낯선 독서 경험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고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1995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는 이러한 사라마구 문학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백색 실명' 전염병이 도시 전체로 확산되면서 벌어지는 극한 상황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충격적이고도 문제적인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소설은 한 남자가 운전 중에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라, 마치 우유 바다에 빠진 것처럼 온통 하얗게 변해버립니다. 이 정체불명의 '백색 실명'은 빠르게 전염되어 도시 전체를 공포와 혼란에 빠뜨립니다.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눈먼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버려진 정신 병원에 강제로 수용합니다. 그곳에서 눈먼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 조건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폭력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문명의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인간은 생존 본능만이 지배하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로 퇴행합니다.
이 끔찍한 혼란 속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처음으로 실명한 남자의 아내이자 안과 의사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눈먼 남편을 돌보기 위해 자신도 눈이 먼 것처럼 위장하여 수용소로 따라 들어가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참상을 홀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녀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락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면서 절망하지만, 동시에 남편과 자신을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을 이끌고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녀의 시력은 단순한 육체적 능력을 넘어, 이성과 양심,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며, 암흑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처럼 갑작스러운 재앙 앞에서 인간 문명이 얼마나 취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 내면에 숨겨진 어둠과 동시에 빛나는 가능성을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탐구합니다. 사라마구는 특유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민과 연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수용소의 지옥도,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민낯
버려진 정신 병원에 격리된 눈먼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식량과 물은 턱없이 부족하고, 위생 상태는 최악이며, 기본적인 질서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은 극단적으로 발현됩니다. 힘센 자들은 약한 자들의 식량을 빼앗고, 여성들은 성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며, 인간적인 연민이나 도덕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수용소는 점차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짐승처럼 변해갑니다. 사라마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명의 껍질이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단면을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려 노력합니다. 유일하게 시력을 잃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눈먼 남편과 자신이 속한 병동의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녀는 끔찍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분노하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나갑니다. 그녀의 존재는 눈먼 사람들에게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며, 그녀를 중심으로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 공동체에는 처음 눈먼 남자, 검은 안경을 쓴 소녀, 사팔뜨기 소년, 눈물을 흘리던 노인 등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 지옥 같은 현실을 함께 견뎌냅니다.
수용소 내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은 한 무리의 폭력배들이 식량을 독점하고 다른 병동의 사람들을 착취하며 여성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권력을 잡았을 때 얼마나 잔인하고 타락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극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는 폭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의사의 아내는 이러한 폭력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폭력배의 우두머리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정당방위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었지만, 그녀 역시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현실의 비극성을 보여줍니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의사의 아내', '처음 눈먼 남자', '검은 안경을 쓴 소녀'와 같이 그들의 특징이나 상황을 나타내는 호칭으로만 지칭합니다. 이는 특정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개성이 사라지고 익명화되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인 단면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문장은 쉼표와 마침표만으로 길게 이어지며 직접 화법과 간접 화법이 뒤섞여 있어, 독자들에게 혼란스럽고 숨 막히는 느낌을 전달하고 마치 눈먼 사람들의 불안정한 시점과 감각을 함께 경험하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백색의 공포를 넘어, 다시 세상을 보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수용소에서 발생한 화재를 계기로 의사의 아내와 그녀가 이끄는 작은 무리가 마침내 바깥세상으로 탈출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도시는 이미 '백색 실명'으로 인해 완전히 마비되고 황폐화된 상태임을 보여주며 절망감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식량과 물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도덕과 질서는 완전히 사라진 채 오직 생존 본능만이 지배하는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의사의 아내와 그녀의 동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인간적인 연대를 지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구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기적처럼 사람들은 하나둘씩 시력을 되찾기 시작하고, 도시는 점차 혼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회복할 가능성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 '회복'이 과연 진정한 구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눈멂'으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목격했던 끔찍한 경험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단면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이는 그들의 삶에 깊은 상처와 함께 새로운 성찰을 남길 것입니다. 의사의 아내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라고 말하며, 육체적인 시력 회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이성과 양심, 그리고 연대의 눈임을 강조합니다.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충격과 감동을 준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한 편의 재난 소설을 넘어, 인간 사회의 본질과 문명의 취약성, 그리고 인간 조건의 근원적인 부조리함을 심오하게 탐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라마구는 '백색 실명'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 중심의 세계관을 해체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이기심, 폭력성, 그리고 무관심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연민과 사랑, 그리고 존엄성을 지키려는 숭고한 노력의 가치를 긍정하며, 독자들에게 희미하지만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독자들에게 불편함과 동시에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이야기 속에 담긴 철학적인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성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단면과 동시에 가장 밝고 위대한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강력하고도 문제적인 작품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갑자기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지금 제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충격적이고도 잊을 수 없는 문학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며,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줄 것입니다.